진주향교 충효교육원 유도회 유교대학 전통문화계승사업 자료실/커뮤니티

향교

연혁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 나라 전통 시대의 교육 중추를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 바로 향교이다. 향교는 오늘날의 국립 고등 교육기관에 해당하는 곳으로 향학(鄕學), 학관(學官), 재관(齋官) 또는 교관(敎官)으로도 불렸다. 향(鄕)은 수도를 제외한 행정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향교는 지방의 학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지방교육이 최초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전래되고 난 이후의 일이며, 구체적으로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각 지역에 설립한 경당에서 비롯된다. 경당에서는 유교의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함께 궁술(弓術)도 가르쳐 문무(文武)를 겸비한 교육을 하였다.

백제와 신라에도 유학이 흥성하여 백제에서는 오경박사(五經博士)제도를 두었고 신라는 태학(太學)을 설치하였지만 지방에 학교가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고구려에 비해 영토가 좁고 인구가 많지 않았던 당시 백제와 신라의 여건상 중앙 이외의 지방에 별도로 교육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데에 기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지방교육은 이전에 비하여 더욱 확대된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완비된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지방학교인 향교

기록에 의하면 향교의 설치는 고려 태조(太祖) 13년(930년)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6부생(六部生)을 가르치고 문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이어 성종(成宗) 6년(987년)에는 전국 12목(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배치하였으며, 주군(州郡)에 학사(學舍)를 세워 지방교육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후 인종(仁宗) 5년(1127년)에는 각 주(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6년(1314년)에는 이곡(李穀)을 모든 주(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가 각 지방에 널리 설치되고 유교교육의 진작과 지방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향교의 본격적인 발달과 체제의 완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이에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고려말에 수입되어 조선왕조의 창업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유교는 국가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명실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보다도 뒤늦게 전래된 불교가 대중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유교는 통치 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양상이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상황 속에서 고려 말 안향(安珦) 등의 학자에 의해 수입된 성리학은 유교의 활성화와 대중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유교 부흥을 위한 두 가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하나는 불교에 대한 배척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유교의 대중화였다. 이는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조선왕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유교의 대중화를 위한 교육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태 조(太祖)는 즉위 원년(1392년)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태조 7년(1398년)에는 성균관의 준공과 더불어 성균관과 병행할 지방교육기구로서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현(州縣)의 실정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다. 태조의 교육정책을 이어받은 태종(太宗)은 향교의 수학(修學) 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삼고 13년(1413년)에 각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학전(學田)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고루 1개소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모두 360개로 늘어나 명실공히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그 체제와 규모 및 기능을 완비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탄압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兩難)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이 극히 피폐해졌으며, 여기에 정치적인 실정(失政)이 거듭됨으로써 국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져 갔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 후반기로 접어들며 기능이 약화된 향교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이 각지에 설치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는 전국에 걸쳐 378개소에 달하였다.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대부분 설립된 서원은 부분적으로 향교의 기능을 보완하고 향촌(鄕村) 사회의 구심점이 되는 등 많은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격화되기 시작한 당쟁(黨爭)과 연결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말기인 대원군(大院君)때에 이르러 마침내 서원 철폐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강력한 서원 철폐 정책은 서원이 당쟁의 근거지가 되어왔던 폐단을 없애기는 하였지만, 향교와 더불어 서원이 지방에서 유교교육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커다란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서원의 쇠퇴에 뒤이어 근대로 접어들며 향교 역시 커다란 시련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국내외적인 급격한 변화의 움직임 속에서 조선왕조는 외세(外勢)의 노골적인 침략을 당하게 되어 국운(國運)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유교교육뿐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갈 인재의 양성, 풍속(風俗)의 교화(敎化) 등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에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과 향교는 일제(日帝)의 집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무력(武力)으로 한국을 합병(合倂)한 일제는 우리의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抹殺)하기 위하여 합병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지방 향교 역시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강압정책(强壓政策)에 따라 성균관은 국립대학으로서 면모(面貌)를 잃고 경전을 교육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轉落)하였으며, 향교 역시 문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이 허용되었다. 이처럼 성균관과 향교의 기능이 박탈됨에 따라 유교 역시 크게 침체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향교

해방에 뒤이은 국토의 분단, 그리고 다시 한차례 밀어닥친 6·25사변의 혼란과 시련 속에서도 유교의 본산으로서의 조직과 체계를 다시금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은 성균관과 각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꾸준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234개의 향교는 이미 체제정비가 완료된 상태이며, 유교와 지역사회 교화의 본산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특히 1980년대 들어오면서 향교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져 전국 각 향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인성교육 현장교실’ 등을 개설하는 등 사회교화(社會敎化)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다.

향교의역할

향교는 고려 태조(太祖) 13년(930년)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6부생(六部生)을 가르치고 문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이어 성종(成宗) 6년(987년)에는 전국 12목(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배치하였으며, 주군(州郡)에 학사(學舍)를 세워 지방교육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이후 인종(仁宗) 5년(1127년)에는 각 주(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6년(1314년)에는 이곡(李穀)을 모든 주(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이에 따라 향교가 각 지방에 널리 설치되고 유교교육의 진작과 지방문화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향교의 본격적인 발달과 체제의 완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 이에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고려말에 수입되어 조선왕조의 창업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유교는 국가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명실상부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보다도 뒤늦게 전래된 불교가 대중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유교는 통치 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양상이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상황 속에서 고려 말 안향(安珦) 등의 학자에 의해 수입된 성리학은 유교의 활성화와 대중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유교 부흥을 위한 두 가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하나는 불교배척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교의 대중화였다. 이는 조선의 개국과 동시에 조선왕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유교의 대중화를 위한 교육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태조(太祖)는 즉위 원년(1392년)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태조 7년(1398년)에는 성균관의 준공과 더불어 성균관과 병행할 지방교육기구로서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주현(州縣)의 실정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다. 태조의 교육정책을 이어받은 태종(太宗)은 향교의 수학(修學) 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삼고 13년(1413년)에 각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학전(學田)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이에 따라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고루 1개소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모두 360개로 늘어나 명실공히 지방 교육기관으로서의 그 체제와 규모 및 기능을 완비하게 되었다.